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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ELINE

[173ep] [미완] 한국농구의 레전드를 찾아서 - 신동파 선수편

본 글은 아래 기사와 논문을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1) 기사 : [민준구의 타임머신] 대한민국의 원조 ‘황금세대’ 1969년 아시아를 제패하다 (jumpball.co.kr)

2) 논문 : 한국체육사학회지 제18권 제2호 「신동파의 생애와 경기력에 대한 입체적인 연구」

 

휘문시절의 신동파

한국농구의 레전드를 찾아서 - 신동파 선수편

 

신동파는 대한민국 농구역사에서 최초의 슈퍼스타로 꼽을 수 있는 선수다.

신동파는 1969년 대한민국 남자 농구가 처음으로 아시아 정상에 오르는데 기여한 주요 인물로 꼽힌다. 그는 두 손을 이용해 던지는 투 핸드 슛이 널리 사용되던 시기에 농구를 배워 남들과 똑같은 슛을 하다가 성장기에 한 손만을 이용해 던지는원 핸드 슛으로 전환한 뒤 대한민국 농구역사에 전례를 찾기 어려운 높은 득점 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득점력을 살려 이 시기의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그를 중심으로 한 '슈터' 중심의 공격 전술을 체질화했고, 이는 최근의 남자농구대표팀에까지 적용되고 있다.(예, Kordenstate)

 

대한민국 농구사(史)에서 신동파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업적이 '국제무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10대 후반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후 신동파는 한국 남자농구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최고 득점자가 되었으며 아시아 무대에서는 NO.1 득점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필리핀을 비롯한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가 활약한 시대는 한국남자농구가 아시아 정상을 지향하면서 미국인 코치에 의한 일련의 훈련 프로그램 개혁과 해외 전지 훈련 등으로 이전과 차별화된 경기력을 습득해 가는 과정에 있었다.

 

1. 신동파

1944년 9월 2일에 함경남도 안변에서 태어나 휘문중, 휘문고등학교를 나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부터 실업팀 중소기업은행에서 활약했다.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여자 농구 실업팀 태평양화학의 감독으로 일했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여자농구 국가대표 팀의 코치와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91년부터 남자농구로 무대를 옮겨 SBS 남자농구단의 창단 감독을 맡았으며, 2012년에는 SBS 서울방송의 농구 해설위원과 대한농구협회 상임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64 도쿄 올림픽,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1970 토리노 유니버시아드, 1970 유고슬라비아 세계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대표선수로서 쌓은 업적과 지도자로서 한국 여자농구 대표 팀을 1982 9 ABC 등에서 우승으로 이끈 공로 등을 인정받아 19671968 서울특별시가 수여하는 문화상(체육 부문), 1967~1969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표창, 1970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또한 정부로부터는 체육훈장 석류백마맹호장 등도 받았다.

 

1.1 신동파의 농구 입문

신동파는 우연한 계기로 농구부에 가입하게 되었다.

신동파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청계천 근처의 모래밭에서 마을 친구들과 야구 하며 놀기를 좋아했고 휘문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곧바로 야구부에 가입했으나 마른체형에 165 비교적  신체였지만 몸무게가 45 안팎이어서 마른 편이었다. 당시 휘문중학교의 야구부 감독은 이러한 체격을 약한 으로 간주하고 너는 몸이 약해 야구선수가  수 없으니 야구를 그만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라며 탈퇴를 권했다

 

야구부에서 물러난 신동파는 그의 키를 눈여겨 당시 휘문고등학교의 어수덕 농구 감독 어수덕(魚秀德) 권유를 받고 농구에 입문하게 되었. 농구가 생소했던 신동파에게 농구의 기본기를 가르친 사람은 최영식(崔泳植)이었다.

당시 휘문고등학교 2학년으로 농구부의 주장을 맡았던 최영식은 신봉호(申鳳浩) 코치의 지시에 따라 신동파에게 농구의 기본기인 패스와 드리블을 배웠지만 슈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동파는 농구에 소질이 있었는지 빠르게 기량이 늘었고 그에게서 재능을 발견한 최영식은 더욱 열성적으로 지도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신동파는 농구에 미쳤다고 할 만큼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몰입은 신동파가 1학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개인훈련에 힘썼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실내 체육관이 없던 휘문중학교에의 사정으로 신동파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귀마개를 하고’ 훈련했다고 한다.

그를 훈련시켰던 최영식의 회고에 의하면 빼빼 마른 신동파의 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는 운동장 200바퀴 달리기를 기본으로 학교 안 계단 100개를 50번, 때로는 100번씩 오르내리게 했고, 토끼뜀을 뛰게 하기도 했다. 신동파는 슛에 재능이 있었는데, 그는 또래에 비해 손이 큰 편이었다. 그 크기가 농구공을 다루기에 적당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재능에 앞서 매일 500개, 때로는 1000개도 마다않고 슛을 던지는 인내력와 농구에 대한 몰입이 슈퍼스타 신동파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신동파가 처음으로 출전한 대회는 휘문중학교 3학년이던 1959 봄에 열린 춘계중고농구연맹전이었다. 그의 생애 경기였던 수송중학교와의 경기에 출전했을 때의 회고를 보면, 신동파는 엄청나게 긴장했던 것 같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도 운데에서도 신동파는 17득점을 올리면서 팀의 41-28 승리에 기여했다. 이 경험을 통해 신동파는 자신이 훌륭한 농구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어렴풋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춘계중고농구연맹전에서 휘문중하교는 대회 우승까지 차지했다.

 

1.2. 세 번의 계기와 원 핸드 슛

신동파가 뛰어난 농구선수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농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스킬 혹은 캐릭터를 정의할 때 화려한 드리블, 리딩, 리바운드, 리더십과 같은 기술이 아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득점능력에 있다. 즉 득점 스킬인 '원 핸드 슛'이야 말로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것이다.

 

한국에 ' 핸드 슛'이 알려진 시기는 불분명하다. 정상윤(丁相允) 증언에 따르면 1955 8 미국인 코치  (John Bunn)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방문하여 대학 선수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이전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원 핸드  기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고 한다(대한농구협회, 1989: 301).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선수가  핸드 세트 슛을 구사하였으며,  핸드 점프  기술이 전래된 다음에도  핸드 세트 슛을 구사하는 선수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신동파는 빠르게 선진 스킬을 습득하고 시대를 풍미한 것이다.

 

신동파는 다음 세 번의 계기를 원 핸드 슛을 장착하고 최초의 슈퍼스타로 성장하게 되었다.

 

첫째는 신동파가 휘문중학교 3학년이던 1959 5월, 국내 최강 팀으로 꼽히던 공군 팀이 휘문중학교로 훈련을 하러 왔을 때 당대 최고의 스타로서 탁월한 스킬을 구사하 김영기(金永基) 움직임을 지켜보고 그를 모범삼기로 작정했을 때이다.

당시 신동파는 김영기의 유연한 몸매와 폼에 반했다고 하며 김영기의 플레이를 흉내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신동파가 흉내를 낸 김영기의 동작에는 ' 핸드 슛'도 있었다. 신동파의 회고록에 의하면 김영기의 '원 핸드 슛'을 묘기라고 묘사했는데, 이 당시에는 국내에서 현대 농구의 기본인 '원 핸드 슛'이 제대로 주목되지 못했던 시기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김영기도 대단하지만, 이를 알아보고 지향점으로 삼았던 신동파의 혜안도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신동파의 성장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룬 번째 시기는 바로 ' 핸드 슛'을 익혀 특기로 삼게 되는, 휘문중학교 3학년에서 휘문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수 있다.

신동파는 신봉호 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원 핸드 슛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코치는 신동파에게 핸드 슛을 던지지 못하면 너는 선수로서 성공하기 어렵고 선수 생명도 길지 않을 이라며 강하게 권했고 신동파 또한 코치의 조언을 듣는 동안 머릿속에서 김영기의 핸드 슛 폼을 떠올렸다고 한다.

 

번째 시점은 1967 서울에서 열린 4ABC 결승에서 필리핀의 전문 수비선수 에드가르도 오캄포(Edgardo Ocampo)에게 봉쇄당해 기대 이하의 경기를 다음 수비 선수를 따돌리기 위한 개인기 향상에 진력하게 되었을 때이다. 신동파는 이 때 10득점에 그친 내가 아직도 젊고 앞으로 선수로서 뛰어야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수비 선수에게 막혀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결코 선수로서 성공했다고 없다. 어떤 수비 선수가 달라붙든지 반드시 제쳐 내고 득점할 있는 기술을 연마해야겠다.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신동파는 훗날 1971년 5월 오캄포와의 재대결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34득점을 올리고 오캄포를 5반칙 파울아웃 시킴으로써 서울에서 당한 선수로서의 수모를 만회했다.

 

신동파는 ' 핸드 슛'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통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 핸드 슛'을 권유한 신봉호 코치도 체계적으로 지도하지는 못했고 골밑에 서서 신동파가 던진 공을 받아 다시 넘겨주면서 반복훈련을 시켰을 뿐이다. 훈련을 시작했을 무렵 신동파가 던진 공은 방향이 제멋대로인데다 힘이 부족해 골까지 날아가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신동파는 무렵 하루 300개의 슛을 던지는 강훈련을 했으며 겨울방학이 되자 신봉호 코치의 지시에 따라 웨이트 트레이닝을 병행하였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핸드 슛을 하기 위한 동력을 제공하는 팔의 힘을 길러 주었을 아니라 체중도 불려 주어 비로소 동작이 안정되기에 이르렀다(신동파 면담, 2012. 8. 30). 동작이 안정되자 실제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운동장을 5~6바퀴 전력으로 질주한 다음 슛을 던지는 훈련을 시켰다. 신동파는 훈련을 2개월 동안 수행한 다음 핸드 슛의 요령을 터득하고 안정된 슛을 구사할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당시 그의 훈련은 하루 500개였다.

 

2. 국가대표 신동파

신동파는 1974년 2월 5일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한 번도 국가대표 팀 명단에서 탈락하는 일없이 주전 선수 자리를 지켰다. 그러므로 신동파의 주된 농구 경력은 연세대학교 진학 이후 국가대표로서 쌓은 경험이나 업적과 일치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2.1 고등학생 신분으로 선발

신동파는 휘문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962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 11 27 대한농구협회는 1963 10 대만 (당시 자유중국)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2 ABC1964 도쿄 올림픽에 대비한 겨울합숙훈련에 참가할 우수남자선수 24명을 선발하였는데, 신동파는 서충원(徐忠源) 더불어 고등학생으로서 이 명단에 포함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인 1963 5 29 18명으로 압축되었다.

 

이때 선발된 선수는 김영기(金永基)문현장(文賢藏)백남정(白南正)이경우(李慶雨)조춘원(趙春元)이규창(李揆昌)

김영일(金永一)정진봉(鄭鎭鳳)김인건(金仁健)이인표(李仁杓)김종선(金鐘善)방열(方烈)하의건(河義鍵)김무현(金武鉉)김철갑(金鐵甲)박영환(朴永煥)김진호(金鎭浩)신동파 등이었다.

 

대한농구협회는 1963 10 11일부터 13일까지 최종 12 선발을 위한 평가전을 열었는데, 16명이 ()()() 팀으로 나뉘어 경기를 했는데, 청팀은 신동파를 포함한 가장 젊은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처음 청ㆍ백ㆍ홍으로 ㅏ눴을 때 청팀이 베테랑 선수들이 다수 포진한 홍팀에 밀릴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김영기가 속한 홍팀이 최강일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청팀은 홍팀을 모두 이겨 놀라움을 샀다. 특히 신동파는 11 열린 백팀과의 경기에서 슛을 16 던져 10개를 성공시킴으로써 62.5%의 높은 적중률을 기록했다. 홍팀과의 경기 기록은 대한농구협회에 남아있지 않다. 신동파는 이러한 활약을 통하여 기량을 인정받고 1963 10 15 발표된 남자농구대표 12명에 포함되었는데, 신동파를 나머지 선수는 김영기문현장이경우이규창김영일정진봉방열김무현하의건이인표

김인건 등이었다.

 

2.2 신동파의 미국 농구 경험

신동파가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던 시기와 겹치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대한농구협회는 미국인 코치를 기용하여 국가대표 팀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기로 하고 미국 대학농구 선수 출신인 주한미군 장교 찰리 마콘(Charlie Marcon)과 제프 고스폴(Jeff Gausepohl) 발탁했다. 

 

신동파는 이들 미국인 코치들에게도 뛰어난 선수로 인정받아 주요한 전술과 작전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신동파는 동시대의 대표선수들과 함께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미국식 훈련을 경험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남자농구 선수들의 훈련은 ()보다 () 호소하는 편으로서, 하루 7시간에 달하는 훈련시간과 반복 훈련, 정신교육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다음은 당시의 훈련 일정이다.

 

아침 훈련 2시간 = 오전 6시 기상, 3㎞ 로드워크, 계단 10차례 오르내리기, 줄넘기, 기초훈련, 숙소까지 로드워크

오전 훈련 2시간 = 오전 10~12. 슈팅을 위주로 한 공격 훈련. 500개 슈팅.

오후 훈련 3시간 = 본격적인 공수패턴 익히기, 작전 학습.

 

미국인 코치들은 이전의 한국인 지도자들과 달리 스케줄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고 가드의 공격적인 기능을 요구하는가 하면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인 매치 (Match Up Zone; 복합수비) 도입하는 체계적으로 경기력의 향상을 꾀했다. 이러한 지도 방식은 당시의 한국인 선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에 대해서 당시 남자농구 대표팀으로 활약하고 훗날 지도자로 경력을 쌓게 되는 인물들은 내용에 대해 다수의 의미 있는 증언을 남겼다. 예를 들어 당시 남자농구 대표팀의 공격 부문에서 신동파와 더불어 주축 선수로 활약한 이인표(李仁杓) 국내 지도자들이랑 다른 , 스케줄이란 나오니까. 시간이면 시간, 뭐는 식으로 100퍼센트 여기 맞춰서 해라 하고. 과거 분들은 시간도 좋고 다섯 시간도 좋고(중략) 우리가 정식 스케줄이라는 미국 코치한테서 처음 받아본 건데, 이런 식으로 하니까 자기가 훈련 시간만큼은 힘을 풀로 발휘할 있고, 그런 달랐지요.라고 증언하였다.

 

신동파는 특히 기술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리바운드를 하기 위한 예비동작과 박스아웃 자세, 타이밍 등 국내 코치들과는 다르게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후에 부임한 코치들도 능률을 극대화하였고, 한국의 선수들과 좋은 인간 관계를 맺어 대표 팀의 결속력을 최고의 수준으로 고양했다. 특히 미군의 협조를 구해 출발한 캐나다-미국 서부-하와이를 거치는 전지훈련은 한국 남자농구 역사상 매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대표 팀의 원정이 갖는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할 있다.

첫째, 한국의 남자농구팀이 미주 지역에서 현지 팀들과 본격적인 경기를 해본 최초의 경험이었다.

둘째, 경기들을 통하여 한국의 남자농구 선수들은 키가 서양팀을 상대로 어떻게 경기를 운영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몸에 익힐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셋째, 농구의 본고장 문화를 체험함으로써 선진농구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국내 농구 발전의 방향과 질적 기준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지도를 받은 선수들은 원정의 기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례로 당시 원정에참여한 선수 가운데 명으로서 연세대와 한국은행을 거쳐 프로농구 대우 제우스와 삼보 액서스의 감독을 역임한 최종규(崔鍾圭, 2013 현재 미국 거주) 전혀 다른 종류의 농구에 눈을 떴다고나 할까? 자꾸 경기를 하면서 느낌이 오고, 나중에는 우리도 좋은 경기를 했다. 큰 선수들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지는 않구나. 이런 걸 많이 하면 쟤들도 어려워하는구나. 이런 걸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우물 안을 벗어나서 (농구를 보고 느끼는) 눈이 뜨인 셈이다.(최종규 면담, 2012. 3. 21)라고 확언하였다. 신동파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우리는 동안 장신에 대한 대비책을 익혔다. 특히 장신의 리바운드 독점을 저지하기 위한 박스아웃(Box Out) 전법과 장신을 뚫는 공격법을 익혔는데 이 뒤에 맞는 멕시코시티 올림픽, 1970 유고 세계농구선수권대회 등에서 우리가 장신과 어깨를 겨루고 싸울 있는 실력은 이때 갖추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신동파 면담, 2012.5. 11).라고 강조하였다. 원정에서 한국 남자농구 대표 팀은 현지 팀과 16차례 이상 친선경기를 하였는데, 구체적인 횟수와 성적은 확정하기 어렵다. 당시 원정에 참가한 선수들의 기억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 가운데 오직 인솔자인 고스폴만 피플 피플 투어(people to people tour)'라고 기억하는 원정의 전적을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그러나 내용 가운데에도 정확한 점수 기록이 빠진 사례가 적지 않다. 신동파는 우리는 미국에서 모두 17차례의 경기를 가져 611패를 기록했다(일간스포츠 1974. 1.30).라고 회고하였지만 김인건은 511, 고스폴은 79패로 기억하였다(허진석, 2011: 113).

2.3. 신동파의 업적

신동파는 1963 10 타이베이에서 열린 2 ABC 시작으로 국가대표 선수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활발하고도 폭넓은 국제 경기 경험을 쌓아 나갔다. 1964 도쿄 올림픽 / 1965 3 ABC(콸라룸푸르) / 1966 5 아시아경기대회(방콕) / 1967 4 ABC(서울) / 2 유니버시아드(도쿄) /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 1969 5 ABC(방콕) / 1970 6 유고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 3 토리노 유니버시아드 /  6 아시아경기대회(방콕) / 1971 6 ABC(도쿄) / 1973 7 ABC(마닐라) 한국 남자농구 대표 팀이 출전한 대회에 모두 출전하여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기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하였다.

 

신동파는 시대의 인물군(人物群) 가운데서도 족적이 가장 뚜렷하다고 있으며, 그의 업적 대부분은 높은 득점력으로 집약되었다.

신동파의 득점 능력은 그가 참가한 각종 국제대회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있다.

신동파가 한국 대표 팀의 주된 득점 선수로 자리를 굳힌 시기는 이전까지 한국남자농구 부동의 에이스로 활약한 김영기가 은퇴한 1966 이후부터이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1970 유고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8경기 261득점, 평균 32.6득점으로 득점 1위를 기록했다.더욱더 경이러운 것은 FG80.4%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특히 준우승 팀인 브라질을 상대로 40점을 기록하는 놀라운 득점력을 발휘하였다.

 

신동파의 경기당 기록은 세계선수권대회 역대 2이며 1위는 그리스의 니콜라오스 갈리스(33.7)이다. 또한 신동파는 차례 올림픽에 참가하였는데, 1964 도쿄 올림픽에서는 9경기에 출전해 80(경기당 8.9),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9경기에 출전해 195(경기당 21.7) 기록하였다.

한국 남자농구가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 못잖게 비중을 대회는 ABC이다. 대회는 아시아의 최강 팀을 가리는 이벤트로서 전통적으로 아시아 강호들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신동파는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여섯 차례 출전하였으며, 1967년부터 한국 팀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힘으로써 경쟁 팀의 주된 수비 목표가 되었다. 그는 한국이 준우승한 1967 서울 대회에서 9경기 205(경기당 22.8), 최초의 우승을 달성한 1969 태국 대회에서 8경기 212(경기당 26.5) 기록하였다. 특히 태국 대회에서 우승을 다툰 필리핀을 상대로 50득점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의 가장 뛰어난 득점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1971 일본 대회에서는 8경기 210(경기당 26.3), 1973 마닐라 대회에서 는 9경기 291(경기당 27.9) 기록하였다. 특히 마닐라 대회의 기록은 대회 도중 발병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훈련은 못하고 경기에만 출전하는 악조건 속에 수립된 수치이다. 신동파는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는 동안 시종 팀의 득점 선수로서 자부심과 함께 강한 책임감을 보였다. 고열로 신음하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가며 출전한 1973 ABC 통하여 이 같은 점을 확인할 있다.

 

일본과 2차전을 하기 전날 밤 열 시쯤 자리에 누운 나는 몸에서 열이 나며 숨이 차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이 심했다. 새벽 4시쯤 김영기ㆍ이인표 선배가 있는 방으로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새벽 5시쯤 대사관 직원이 호텔에 찾아와 나를 병원으로 옮겼다. 나를 진찰한 의사 라구만 선생은 알레르기성 기관지염이며 안정을 요한다고 진단했다. 이 순간 나는 일본과의 경기가 떠올랐다. 산소 호흡기를 꽂고 누워 있던 나는 어떻게 하든지 뛰어야 한다.는 생각에 묻혀 있었다. 경기 시간이 가까워지니 몹시 초조해졌다. 나는 의사에게 퇴원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자기가 동반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경기가 열리기 10분 전에 의사와 함께 라커 룸에 들어가 김영기 선배에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김 선배는 만류했지만 나는 뛰겠다.고 말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의사와 함께 병원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필리핀과 결승전을 할 때 의사와 함께 경기장으로 직행했다(신동파 면담, 2012. 5. 11).

 

신동파의 카리스마는 아시아 무대에서 두드러지고, 당대 아시아 최고의 농구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던 필리핀에서 추앙을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일례로 1973 4 29일에 발행된 필리핀의 󰡔익스프레스 스포츠(Express Sports)󰡕 필리핀의 -현직 농구 스타와 전문가들을 동원해 신동파를 막기 위한 비책을 설문하였는데, 공통적으로 일대일 수비로는 막을 없고 팀이 합심해야 한다.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